서론: 균등론 판례 법리의 진화 과정
특허권의 보호 범위는 청구범위의 문언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원칙이지만, 제3자가 특허발명의 핵심을 유지한 채 비본질적인 부분만을 변경하여 특허망을 회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판례법상 ‘균등론’이 발전해 왔습니다. 대한민국 대법원은 일련의 판결을 통해 균등론의 적용 요건을 제시하고, 시대의 변화와 기술의 발전에 따라 그 판단 기준을 끊임없이 정교화해왔습니다.
이하에서는, 대한민국 균등론의 초석을 다진 대법원 97후2200 판결에서부터 시작하여, 판단 기준을 구체화한 2007후3806 판결, ‘기술사상의 핵심’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2012후1132 판결, 그리고 ‘기술발전 기여도’라는 새로운 차원의 기준을 제시한 2017후424 판결 및 2018다267252 판결에 이르기까지, 주요 판례들을 통해 균등론 법리가 어떻게 심화되고 발전해왔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1장: 균등론 5요건 법리의 확립 (대법원 2000. 7. 28. 선고 97후2200 판결)
대한민국 균등론의 구체적인 판단 기준을 최초로 명확하게 제시한 판결은 대법원 97후2200 판결입니다. 이 판결은 균등침해 성립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체계적인 5가지 요건을 확립했으며, 그 골격은 현재까지도 균등론 판단의 핵심 프레임워크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97후2200 판결이 제시한 균등침해 5요건]
(적극적 요건 1) 과제해결원리의 동일성: 양 발명의 기술적 사상 내지 과제의 해결원리가 동일할 것.
(적극적 요건 2) 작용효과의 실질적 동일성 (치환가능성): 치환된 구성이 특허발명의 구성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작용효과를 나타낼 것.
(적극적 요건 3) 치환의 용이성 (치환자명성): 그와 같이 치환하는 것이 통상의 기술자에게 용이하게 도출될 수 있을 것.
(소극적 요건 1) 자유실시기술 배제: 침해품이 특허발명의 출원 시에 이미 공지되었거나 그로부터 용이하게 도출될 수 있는 기술이 아닐 것.
(소극적 요건 2) 의식적 제외 배제 (출원경과 금반언): 침해품의 구성이 특허 출원 과정에서 의식적으로 제외된 것이 아닐 것.
이 판결은 균등론에 대한 막연한 개념을 구체적인 판단 기준으로 정립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나, 각 요건의 구체적인 의미와 판단 방법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판례의 축적을 통한 구체화가 필요한 과제를 남겼습니다.
제2장: 판단 기준의 심화 – ‘구성’에서 ‘기술사상의 핵심’으로
97후2200 판결 이후, 대법원은 특히 제1요건인 ‘과제해결원리의 동일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에 대해 지속적으로 법리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는 균등 여부의 판단 기준이 개별 ‘구성’의 형식적 대비에서 벗어나, ‘특허발명의 실질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줍니다.
2.1. 2007후3806 판결: ‘비본질적 부분’과 ‘특징적 구성’의 도입
대법원은 2009년 2007후3806 판결을 통해 처음으로 ‘과제해결원리의 동일성’의 의미를 구체화했습니다.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과제의 해결원리가 동일하다는 것은 확인대상발명에서 치환된 구성이 특허발명의
비본질적인 부분이어서 확인대상발명이 특허발명의 특징적 구성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판시했습니다.
이는 법원이 발명을 ‘본질적 부분’과 ‘비본질적 부분’으로 나누어 분석하고, 균등의 대상을 비본질적 부분의 변경에 한정하려는 시도를 보여준 것입니다. 또한 ‘특징적 구성’을 파악하기 위해 명세서와 출원 당시 공지기술을 참작하여 선행기술과 대비해야 함을 명시함으로써, 판단의 객관성을 높이고자 했습니다.
2.2. 2012후1132 판결: ‘기술사상의 핵심’으로의 전환
2014년 대법원은 2012후1132 판결에서 판단 기준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습니다. 이 판결은 ‘특징적 구성’이라는 표현 대신, 과제해결원리의 동일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특허발명에 특유한 해결수단이 기초하고 있는 기술사상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실질적으로 탐구하여 판단하여야 한다”고 판시했습니다.
‘기술사상의 핵심’은 물리적 ‘구성’보다 한 차원 추상화된 개념으로, 보호 대상을 단순한 부품의 조합이 아닌, 그 발명이 구현하는 근본적인 아이디어나 원리로 격상시킨 것입니다. 이로써 법원은 청구항의 문언에 얽매이지 않고 발명의 본질을 더욱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균등침해의 적용 범위가 완화되고 넓어졌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2.3. 2017후424 & 2018다267252 판결: ‘기술발전 기여도’와의 연동
가장 최근의 중요한 변화는 2019년에 선고된 2017후424 판결과 2018다267252 판결에서 나타납니다. 이들 판결에서 대법원은 “특허법이 보호하려는 특허발명의 실질적 가치는 선행기술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기술과제를 특허발명이 해결하여 기술발전에 기여하였다는 데에 있다”고 명시했습니다.
이는 균등 범위의 넓이를 특허의 ‘기술발전 기여도’라는 고도의 정책적 판단 기준에 연동시킨 것입니다. 즉, 선행기술 대비 기술발전 기여도가 큰 발명일수록 그 기술사상의 핵심을 넓게 파악하여 더 넓은 균등 범위를 인정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좁게 해석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한 것입니다.
또한 2018다267252 판결은 제2요건인 ‘작용효과의 실질적 동일성’에 대해서도 새로운 판단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기술사상의 핵심이 공지되지 않은 경우, “특허발명에 특유한 해결수단이 기초하고 있는 기술사상의 핵심이 침해제품 등에서도 구현되어 있다면 작용효과가 실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 원칙”이라고 판시하여, 제1요건과 제2요건의 판단을 유기적으로 연결했습니다.
결론: 발명의 실질적 가치 보호를 향한 법리의 진화
대한민국 대법원의 균등론 관련 판례들은 지난 20여 년간 형식적인 구성요소 대비에서 벗어나, 발명의 실질적 가치와 기술사적 의의를 중심으로 보호 범위를 획정하는 매우 유연하고 정교한 법리로 진화해왔습니다.
97후2200 판결이 5요건의 틀을 마련한 이래, 법원은 ‘특징적 구성(2007후3806)’을 거쳐 ‘기술사상의 핵심(2012후1132)’으로, 그리고 마침내 ‘기술발전 기여도(2017후424)’라는 기준에 이르기까지 판단의 깊이를 더해왔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특허 제도의 근본 목적인 기술 발전 촉진과 발명가에 대한 공정한 보상 사이에서 최적의 균형점을 찾으려는 사법부의 지속적인 노력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앞으로도 기술이 더욱 복잡해짐에 따라, 이 ‘살아있는 원칙’으로서의 균등론은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며 발전해 나갈 것으로 전망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