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성의 법적 기초와 판단 체계
한국 특허 제도는 산업 발전을 목표로 하며, 이를 위해 발명에 독점배타적 권리를 부여한다. 특허를 받기 위한 핵심 요건 중 하나인 진보성은 특허법 제29조 제2항에 근거한다. 해당 조항은 ‘통상의 지식을 가진 사람(통상의 기술자)’이 ‘선행기술’로부터 ‘쉽게 발명할 수 있는 것’은 특허를 받을 수 없다고 규정한다. 이는 단순 개량이 아닌 실질적 기술 진보를 이룬 발명만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진보성 판단의 주체인 ‘통상의 기술자’는 해당 기술 분야의 평균적인 전문가 수준의 지식과 통상적인 창작 능력을 보유한 가상의 인물이다. 판단의 기반이 되는 ‘선행기술’은 출원 전 국내외에 모든 형태로 공개된 기술을 포함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발명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사후적으로 평가하는 ‘사후적 고찰의 금지’이다.
한국 실무는 이러한 추상적 기준을 구체화하기 위해 ‘목적-구성-효과’라는 분석적 틀을 확립했다. 이 틀의 핵심은 발명의 기술적 수단이 선행기술로부터 쉽게 도출될 수 없는지를 평가하는 ‘구성의 곤란성’이다. 그리고 발명이 해결하려는 과제가 새로운 ‘목적의 특이성’과 선행기술로부터 예측할 수 없는 ‘효과의 현저성’은 구성의 곤란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간접 증거로 작용한다. 특히 화학, 의약 등 예측 불가능한 기술 분야에서는 효과의 현저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구성’과 ‘효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지가 한국 진보성 판단기준 변천의 핵심적인 역사이다.
진보성 판단기준의 역사적 변천
한국의 진보성 판단기준은 크게 세 시기를 거치며 발전했다.
초기: ‘효과의 현저성’ 우위 시대 (2007년 이전)
2007년 이전 판례는 ‘효과의 현저성’을 사실상의 필수 요건으로 간주했다. 1989년 대법원 판결(88후769)은 결합발명의 경우 선행기술로부터 예측되는 효과 이상의 ‘새로운 상승효과’가 있어야 진보성을 인정했다. ‘효과 중심주의’는 구성이 창의적이더라도 우월한 효과를 입증하지 못하면 특허를 받기 어렵게 만들어, 특허권자에게 불리하고 권리 안정성을 저해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전환기: ‘결합의 동기’ 논리 부상 (2007년)
2007년 대법원 판결(2005후3284)은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이 판결은 여러 선행기술을 결합하여 진보성을 부정하려면, 통상의 기술자가 그 기술들을 결합하려는 ‘암시, 동기’ 등이 선행기술 문헌이나 당시의 기술상식, 업계의 요구 등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로써 진보성 부정의 논리적 근거 제시가 의무화되었고, ‘현저한 상승 효과’는 더 이상 필수 요건이 아니게 되었다. ‘효과의 현저성’은 구성의 곤란성을 뒷받침하는 여러 고려요소 중 하나로 위상이 조정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지식재산권 보호를 강화하려는 사법 정책의 전환, 미국 등 국제적 조류와의 조화, 그리고 사후적 고찰 방지를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현대: 구성과 효과의 통합 (2019년 이후)
2019년 이후 ‘아픽사반 판결’(2019후10609) 등 일련의 대법원 판결은 2007년의 논리적 틀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었다. 특히 선택발명과 같이 효과 예측이 어려운 분야에서, 대법원은 구성의 곤란성 판단을 생략하고 효과만으로 진보성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대신 ‘예측할 수 없는 현저한 효과’는 그 자체로 진보성의 요건이 아니라, 그 효과를 낳은 ‘구성의 곤란성을 추론하는 유력한 자료’가 된다고 판시했다. 즉, 놀라운 효과는 애초에 그 구성을 선택할 동기가 없었거나 선택이 어려웠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결합의 동기’라는 구성적 판단을 중심으로 하되, 그 과정에서 ‘효과’라는 실질적 증거를 적극 활용하는 통합적 접근법이 확립되었고, 이는 결정형, 제형 등 다른 의약 발명에도 확대 적용되었다.
기술 분야별 진보성 판단기준의 적용
일반 원칙은 모든 기술 분야에 적용되지만, 각 분야의 특성에 따라 구체화된다.
결합발명: 개별 구성요소가 아닌 ‘유기적으로 결합한 전체’로서 평가해야 한다. ‘결합의 동기’가 없는 경우 진보성이 인정될 수 있으며, 개별 효과의 총합을 뛰어넘는 ‘복합적인 상승효과’는 진보성의 강력한 긍정 요소이다.
화학·의약·바이오 발명: 효과 예측이 어려운 ‘예측 불가능한 기술’ 분야로, ‘효과의 현저성’이 중요하다. 선택발명과 결정형 발명은 현대의 통합적 접근법에 따라 구성의 곤란성과 효과의 현저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수치한정발명은 한정된 수치 범위가 ‘임계적 의의’를 가져야 한다. 의약용도발명은 새로운 치료 효과를 쉽게 예측할 수 없어야 진보성이 인정된다. 단일클론항체 발명은 항원이 신규하면 진보성이 인정되나, 항원이 공지된 경우엔 예측 불가능한 현저한 효과를 입증해야 한다.
소프트웨어·BM·AI 발명: 단순한 추상적 아이디어가 아닌, 하드웨어를 이용해 구체적으로 구현된 ‘기술적 사상’이어야 한다. 진보성 판단의 핵심은 ‘공지된 인간 활동의 단순 자동화’와 ‘진정한 기술적 진보’를 구별하는 것이다. 특허청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1) 새로운 AI 모델 자체, (2) 독창적인 데이터 전·후처리 방식, (3) AI를 특정 기술 분야에 적용하여 예측 불가능한 현저한 효과를 달성한 경우 등에 진보성이 인정될 수 있다.
비교법적 분석 및 미래 전망
한국의 진보성 기준은 주요국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했다. 미국의 Graham factors와 KSR 판결의 유연한 접근법, 특히 TSM 테스트는 한국의 ‘결합의 동기’ 법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유럽(EPO)의 고도로 구조화된 ‘과제-해결 접근법(PSA)’은 가장 가까운 선행기술에서 출발하여 객관적 기술 과제를 설정하고 해결책의 자명성을 판단하는 연역적 방식이라는 점에서 한국과 차이가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진보성 판단기준은 ‘효과 중심주의’에서 ‘구성 중심주의’로, 다시 ‘구성과 효과의 통합’이라는 정교한 기준으로 진화해왔다. 이는 특허권 보호를 강화하는 정책 기조와 국제적 조화를 추구한 결과이다. 향후 가장 큰 도전은 AI, 바이오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이다. 특히 생성형 AI의 발전은 ‘통상의 기술자’의 능력을 상향시켜 진보성 판단의 문턱을 높일 것이다. 미래에는 AI가 발명 과정에 기여한 정도를 평가하고 진정한 인간의 창의성을 가려내는 것이 새로운 과제가 될 것이다. 앞으로도 한국의 진보성 판단기준은 현재의 통합적 틀 안에서 새로운 기술 도전에 대응하며 판례와 심사기준을 통해 점진적으로 정교화될 것이며, 이는 진정한 혁신을 보호하고 산업 발전을 촉진하는 특허 제도의 본질적 목적을 달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