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88후769 판결: 특허 진보성 판단기준

1. 서론: 진보성 판단의 의의와 기준

특허 제도는 기술적 창작을 보호하여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를 위해 발명은 산업상 이용가능성, 신규성, 진보성이라는 3대 요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 중에서 진보성은 특허법 제29조 제2항에 따라, 해당 기술 분야의 ‘통상의 기술자’가 출원 시점에서 선행기술로부터 ‘쉽게 발명할 수 없는’ 비자명적인 기술적 창작에만 특허를 부여하기 위한 핵심 요건입니다.

판례와 실무는 진보성 판단을 위해 발명을 목적, 구성, 효과의 세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하며, 여기서 ‘목적의 특이성’, ‘구성의 곤란성’, ‘효과의 현저성’이라는 구체적인 판단 요소를 도출했습니다. 이 중에서 ‘구성의 곤란성’을 중심으로 판단하되, 다른 요소들을 보충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현재의 확립된 접근 방식입니다.
이러한 원칙의 확립에 있어서, 88후769 판결은 중요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2. 88후769 판결의 핵심: ‘효과의 현저성’을 독립적 기준으로 확립

대법원 1989. 7. 11. 선고 88후516 판결 및 대법원 1989. 11. 24. 선고 88후769 판결은 특허 진보성 판단 기준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제시하는 시도를 하였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판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판결 이전에는 주로 공지기술의 단순한 집합이나 다른 분야로의 전용(轉用)에 해당하는지를 중심으로 진보성을 판단하여, 구성의 변경이 미미하지만 효과가 극적인 화학, 의약 발명 등에 적용할 명확한 기준이 부족했습니다.

88후516 판결은 거절사정 사건에서, “출원발명이 공지, 공용의 기존기술을 종합한 경우에는 선행기술을 종합하는데 각별한 곤란성이 있다거나 이로 인한 작용효과가 공지된 선행기술로부터 예측되는 효과 이상의 새로운 상승효과가 인정되고 그 분야에서 통상의 지식을 가진 자가 선행기술에 의하여 용이하게 발명할 수 없다고 보여지는 경우나 새로운 기술적 방법을 추가하는 경우에는 출원발명의 진보성이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판시하였습니다.
88후769 판결은 등록무효 사건에서, 동일한 취지를 판시하였습니다.

이러한 판결은 구성의 곤란성에 대하여 각별한 곤란성이 있어야 한다는 엄격한 요건을 제시하였다는 점이 이후에 한계로 지적되었으나, 특허 진보성 판단기준의 명확성을 향상시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한편, 판결은 ‘효과의 현저성’을 구성의 곤란성을 뒷받침하는 간접적인 증거(이차적 고려설)로 보던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진보성을 인정할 수 있는 독립적인 요건(독립요건설)으로 격상시켰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판결로 인해 특허 실무의 패러다임은 ‘구성’ 중심에서 ‘효과’ 중심으로 이동했으며, 출원인들은 객관적인 실험 데이터를 통해 발명의 우수한 효과를 입증함으로써 진보성을 주장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3. 88후769 판결 이후 법리의 발전과 심화

88후769 판결이 제시한 실체적 기준을 바탕으로, 후속 판례들은 판단 방법론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었습니다.

결합발명 법리의 정립: 여러 공지기술을 결합한 발명의 경우, 개별 구성요소로 분해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결합한 전체’로서의 기술사상을 평가해야 한다는 ‘전체적 관점’ 원칙이 확립되었습니다. 또한, 통상의 기술자가 선행기술들을 결합할 ‘동기’가 있었는지가 핵심 판단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2005후3284 판결).

‘사후적 고찰 금지’ 원칙의 확립: 2009년 대법원 2007후3660 판결은 진보성 판단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중요한 절차적 원칙을 세웠습니다. 이 판결은 발명의 내용을 이미 아는 상태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며 “쉽게 발명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사후적 고찰(hindsight bias)’의 오류를 명시적으로 금지했습니다. 또한, ① 선행기술의 범위와 내용, ② 발명과 선행기술의 차이, ③ 통상의 기술자 수준을 객관적으로 확정한 후, 이를 바탕으로 용이성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체계적인 접근법을 제시하여 판단 과정의 객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였습니다.

최근 동향: ‘구성의 곤란성’ 재조명과 균형 회복: 88후769 판결 이후 이어진 ‘효과 중심주의’는 일부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이에 최근 대법원은 다시 ‘구성의 곤란성’을 강조하며 균형을 맞추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대표적으로 2021년 대법원 2019후10609 판결(아픽사반 사건)은 효과가 특히 중요한 선택발명에서도 효과의 현저성만으로 진보성을 판단해서는 안 되며, ‘구성의 곤란성’ 역시 반드시 함께 심리해야 한다고 판시했습니다. 이는 88후769 판결 이후 효과 쪽으로 크게 기울었던 진보성 판단의 추를 다시 구성과 효과의 종합적 판단이라는 균형점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로 해석됩니다.

4. 결론: 역사적 의의와 미래 전망

대법원 88후769 판결은 ‘효과의 현저성’이라는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추상적이었던 진보성 법리를 실무에 적용 가능하게 한 의미있는 판결입니다. 이 판결은 한국 특허 실무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으며, 이후 사후적 고찰 금지 원칙의 확립, 구성과 효과의 균형점 모색 등 후속 판례들을 통해 더욱 정교하고 체계적인 법리로 발전하는 초석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