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특허 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실시가능요건’에 대해 법리적 토대, 기술 분야별 적용, 그리고 실무 전략을 종합적으로 설명합니다. 특허 제도는 발명가에게 독점권을 부여하는 대가로 그 기술을 사회에 완전히 공개하도록 하는 사회적 계약에 기반하며, 실시가능요건은 이 계약을 이행하는 핵심 법적 장치입니다. 이는 특허 명세서가 해당 기술 분야의 ‘통상의 기술자’가 과도한 실험이나 특수한 지식 없이 발명을 쉽게 재현할 수 있도록 명확하고 상세하게 작성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제1부: 법리적 토대와 해석
주요국 법규 비교: 한국, 미국, 유럽은 ‘통상의 기술자에 의한 용이한 실시’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지만, 법적 표현과 해석에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 (특허법 제42조 제3항 제1호): 명세서가 제3자에게 기술을 전달하는 ‘기술 문헌’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며, ‘쉽게 실시’할 수 있는 ‘재현 가능성’을 핵심 기준으로 삼습니다.
미국 (35 U.S.C. § 112(a)): 발명 공개를 독점권에 대한 ‘대가(quid pro quo)’로 명확히 하며, 발명을 ‘만들고 사용하는 방법’의 구체성을 요구합니다. 특히 실시가능요건과 별개로, 출원인이 발명을 소유했음을 증명하는 ‘서면 기재 요건’을 요구하는 점이 특징입니다.
유럽 (EPC 제83조): ‘공개의 충분성’을 요구하며, 통상의 기술자가 발명을 재현하는 데 ‘과도한 부담(undue burden)’이 없어야 함을 핵심 기준으로 삼습니다.
‘통상의 기술자’의 법적 구성: 실시가능요건 판단의 기준점인 ‘통상의 기술자’는 해당 기술 분야의 평균적인 전문가를 상정한 법적 가상 인물입니다. ‘통상의 기술자’의 기술 수준 설정은 실시가능요건과 진보성 요건 사이에 양날의 검으로 작용합니다. 기술 수준을 높게 설정하면 명세서 기재 부담은 줄지만 진보성 부정 위험이 커지고, 반대로 낮게 설정하면 진보성 인정에는 유리하지만 훨씬 상세한 기재가 요구되어 실시가능요건 위반 위험이 커집니다. 따라서 두 요건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전략적 수준 설정이 필수적입니다.
‘과도한 실험’의 판단 기준: ‘용이한 실시’는 합리적 수준의 실험을 포함하며, 그 한계를 넘어서는 ‘과도한 실험’이 요구될 때 실시가능요건 위반이 됩니다. 미국 판례에서 정립된 ‘Wands Factors’는 과도한 실험 여부를 판단하는 체계적인 분석 틀을 제공하며, ①청구항의 넓이, ②발명의 성질, ③필요한 실험의 양, ④명세서의 지침, ⑤실시예의 존재, ⑥선행기술의 상태, ⑦통상의 기술자 수준, ⑧기술의 예측 가능성 등 8가지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합니다. 한국 법원도 명시적으로 인용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유사한 논리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제2부: 기술 분야별 적용 및 판례 분석
바이오·제약 발명: 생명 현상의 예측 불가능성으로 인해 가장 엄격한 기준이 적용됩니다.
의약용도발명: 단순히 약효를 선언하는 것을 넘어,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약리 데이터나 작용기전 설명이 요구됩니다. 한국의 ‘엔트레스토’ 특허 무효 판결은 복합제의 상승효과에 대한 구체적 데이터가 없어 실시가능요건 위반으로 판단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기능적 청구항의 한계 (Amgen v. Sanofi): 미국 연방대법원은 기능적으로 정의된 방대한 범위의 항체 청구항에 대해, 소수의 실시예만으로는 전체 범위를 실시할 수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이는 “더 많이 청구할수록, 더 많이 공개해야 한다”는 원칙을 확립하며, 발명의 재현 방법을 가르치는 대신 ‘탐사 면허(hunting license)’를 부여하는 식의 명세서를 배격했습니다.
유럽의 ‘신뢰성(Plausibility)’ 법리: 출원 당시 명세서 기재만으로 주장된 기술적 효과가 ‘신뢰할 만한지’를 따지며, 신뢰성이 없으면 출원 후 제출된 데이터로 하자를 치유할 수 없다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합니다.
파라미터·수치한정 발명: 청구된 범위 전체에 걸친 재현 가능성이 핵심입니다.
실패 사례 (대법원 2013후525): 명세서의 실시예가 청구된 수치 범위의 극히 일부만 보여주고 나머지 범위를 구현할 방법을 제시하지 못해 무효가 되었습니다. 이는 넓은 범위를 주장하려면 그 범위 전체를 아우르는 일반 원리나 다양한 구현 방법을 제시해야 함을 시사합니다.
성공 사례 (대법원 2017후1298): 출원인이 새로 만든 파라미터의 정의와 측정 방법을 명세서에 명확히 기재하고, 그 기술적 의의를 설명하여 유효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발명의 경계를 특정하는 ‘지도’와 ‘측량 방법’을 모두 제공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인공지능(AI)·소프트웨어 발명: AI 모델의 ‘블랙박스’ 특성이 새로운 도전을 제기합니다.
명세서 기재 요건: 추상적인 기능 설명을 넘어 AI 모델의 구체적인 아키텍처(신경망 구조 등), 주요 함수, 학습 프레임워크 등을 상세히 기재해야 합니다.
학습 데이터 공개: 학습 데이터는 발명의 본질적 구성요소이므로, 데이터셋 자체를 공개할 필요는 없으나 모델 성능을 좌우하는 데이터의 핵심 특징(종류, 출처, 전처리 과정 등)은 반드시 기술해야 합니다.
재현성 위기: AI 학계의 ‘재현성 위기’ 논의는 특허법상 실시가능성 판단 기준에 중요한 참고가 되며, 학문적 재현성을 위해 요구되는 정보 수준이 법적 최소 기준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3부: 비교법적 고찰 및 실무 전략
주요 특허청 심사 실무: KIPO, USPTO, EPO는 각기 다른 심사 중점을 가집니다. KIPO는 균형 잡힌 실용적 접근을, USPTO는 청구항과 공개 범위의 일치를, EPO는 가장 엄격한 기준과 ‘신뢰성’ 법리를 적용합니다. 따라서 글로벌 특허 전략은 각국의 가장 엄격한 기준을 모두 충족시키는 ‘다중 관할권 방어적 명세서 작성’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분쟁 예방을 위한 명세서 작성 전략: 명세서는 미래의 소송을 예방하는 ‘전략적 위험 관리 문서’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성곽(fortress)’ 구조의 청구항: 가장 넓은 독립항과 함께 점진적으로 범위를 좁히는 다양한 종속항을 설계하여, 독립항이 무효가 되더라도 종속항으로 권리를 방어해야 합니다.
실시예의 중요성: 실제 수행된 실험에 기반한 ‘실제 실시예(Working Example)’는 실시 가능성의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청구 범위의 다양성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다양한 실시예를 포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리 중심의 기재: 현재의 실시 형태 나열을 넘어 발명의 근본적인 ‘원리’를 설명함으로써 미래의 변형 기술까지 포섭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야 합니다.
결론
실시가능요건은 기술 발전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하는 법리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준이 상향 평준화되고 있으며, 특히 바이오, AI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는 출원 시점에 구체적 데이터에 기반한 실질적 공개를 요구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이는 ‘선출원, 후데이터’ 전략의 종말을 의미하며, R&D 및 IP 전략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합니다. 미래에는 생성형 AI가 만들어내는 방대한 정보가 선행기술로 인정될 수 있는지, AI의 발명자 자격 문제 등 새로운 법적 과제가 등장할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실무자들은 방어적이고 전략적인 명세서 작성, 다학제적 협업 강화, 그리고 국제적 정책 논의 선도에 힘써야 합니다. 결국, 실시가능요건을 깊이 이해하고 견고한 명세서를 구축하는 것이 기술 경쟁 시대의 최종 승자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될 것입니다.

